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티오키아 공국 (문단 편집) === [[동로마 제국]]과의 분쟁 ===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705e8e9720d2cbdcea1129bfdeab3069.jpg]]|| ||레몽이 통치하던 시기의 레반트 판도, 녹색 빗금이 안티오키아 공국이 점령한 [[동로마 제국]]의 영토 킬리키아이다. || 동방의 에데사 백작령이 약체화되고 [[알레포]]에서 [[장기 왕조]]가 발흥해 십자군을 위기에 밀어넣는 상황에서, 새 안티오키아 공작, 푸아티에의 레몽은 확장의 방향을 킬리키아로 잡았다. 당시 킬리키아의 패권은 [[동로마 제국]]에게 있었다. [[아르메니아 왕국]]의 레오 1세는 제국의 [[요안니스 2세]]에게 대패하고 타우루스 산맥의 요새 속에 숨어들었고, 다니슈멘드 왕조는 5차례의 대회전 끝에 결국 중서부 아나톨리아의 영토를 동로마에게 토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타르수스, 아다나, 시스 등의 대도시와 요새지역을 제외하고, 동로마의 지배는 아직 불안정했다. 지역의 아르메니아 소영주들은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기꺼이 받아들였으나 산지와 농촌에는 [[아르메니아 왕국]] 게릴라가 판을 치고, 북부의 안티타우루스 관문으로는 다니슈멘드가 계속해서 킬리키아를 노렸다. 수천의 상비군이 킬리키아에 배치되어 있었지만 분산되어 있어 효율적일 수가 없었다. 1136년 4월에 공작이 된 푸아티에의 레몽은 이 기회를 십분 활용, 시스와 타르수스를 포함한 대도시 5곳과 수십 개의 촌락을 기습 점령하고, 산지에서 농성하던 [[아르메니아 왕국]]의 레오 1세와 동맹했다. [[요안니스 2세]]는 안티오키아 공국이 3번씩이나 통수를 치자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1138년, [[바랑기안 가드]], [[카타프락토이]]중앙군, [[페체네그]] 정예 용병으로 구성된 4만 8천의 대군이 킬리키아를 휩쓸었다. 해봐야 1만명도 안되는 공국군은 한 주도 채 버틸 수가 없었다. 동맹군 아르메니아도 다시 산속으로 숨어버리자, 안티오키아는 그대로 동로마 제국의 공격에 노출되었다. [[요안니스 2세]]는 징벌의 차원으로 안티오키아 근교 5개 도시와 수십개의 촌락을 약탈했다. 상황은 최악이었다. [[장기 왕조]]의 군대도 동로마 제국의 거병 소식을 듣고 시리아 인근으로 진격해왔고, 안티오키아는 그 둘 중 어느 것도 막을 수 없었다. 레몽은 결국 동로마에 항복했다. 요안니스 황제는 즉각 안티오키아를 동로마에 반환하고, 이번 전쟁의 군비를 안티오키아 공작이 지불하며, [[라틴 총대주교]]구를 포기하고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정교회 총대주교]]를 복위시킬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레몽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고, 이곳 귀족들이 아직 자신의 편임을 알고 있던 레몽은 황제가 새 영지를 준다면 그 조건으로 항복할 것임을 단언했다. 노르만 귀족들을 선무하기 위해, 황제는 그의 요구를 수락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